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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애프터 리딩>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오인의 구조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보면 ‘동굴의 우상’이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동굴 속에서만 평생 살은 사람들은 동굴 속에 비친 그림자가 진짜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실은 동굴 밖 실제 세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동굴 속 사람들은 평생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동굴의 우상이라는 비유를 이데아론 혹은 형상이론이라는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해 말했던 것이지요. 세상의 참된 본질 혹은 진리는 감각적 경험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경험적 세계에 있지 않고, 경험적 세계의 원형, 즉 이데아라고 하는 초월적 ‘실재’에 존재하며 경험적 세계는 이러한 원형으로서의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세계에 현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이데아론의 기본골격입니다.

칸트는 그의 비판철학을 통해서 이러한 플라톤철학의 이원적 인식론으로의 이데아론을 수용합니다. 다만 그에게 이데아의 진리를 드러내는 주체는 이성을 가진 인식주체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일어납니다. 진리를 추인하는 주체은 이제 현상계 너머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인식에 의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로 되돌아 오게 된 것이지요. 일종의 ‘플라톤철학의 전복’이 일어난 셈입니다. 이데아적 보편성을 인식주체의 주관성에서 찾는 전회. 이러한 전회는 ‘오성’과 ‘이성’을 구분할 때 사용되는 양자의 차이에서도 발견됩니다. ‘오성’은 감각경험과 보편성들 간의 유한한 결합과 관련되는 반면 ‘이성’은 양자의 ‘무한한’ 혹은 ‘무제약적인’ 결합과 관련됩니다. 헤겔의 “무한판단”과 같은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유한성으로는 판단되지 않는 논리적 곤궁을 나타내는 ‘이율배반’(antinomy)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오성이 아닌 이성이지요. 헤겔의 철학은 이러한 칸트적인 주관성으로서의 이성을 확대발전시켜 ‘사유와 존재의 무한한 통일’로 완성함으로써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내기도 했지요.

이처럼 ‘존재’ 혹은 ‘실재’ 그 자체는 우리에게 날 것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상이나 가상에 가까운 무엇이지요. 라캉은 그것을 ‘실재(계)’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실재계는 상징계처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상들 혹은 대상들 간의 관계의 인식은 이 실재계가 그 대상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 줄 때에만 가능하다고 라캉은 이야기 합니다. 지젝은 이를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적용시켜 현실 내부의 허상과 실재간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단지 실재의 환상적 재현으로서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파악된 이러한 실재 그 자체이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사회적) 존재의 ‘허위의식’이 아닌 존재가 ‘허위의식’에 의해 유지되는 한에서의 존재 그 자체이다.”( Ideology is not simply a 'false consciousness', an illussory representation of reality, it is rather this reality itself which is already to be conceived as 'ideological'.... ‘Ideological' is not the 'false consciousness' of a (social) being but this being itself in so far as it is supported by 'false consciousness.' )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lavoj ZiZek. Verso. 21쪽)

따라서 우리는 이데올로기 없는 ‘실재’나 혹은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는 원래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현실로부터 이데올로기적 가상을 벋겨낸 실재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오인의 구조를 통한 ‘증상’은 필연적입니다.

실재는 이처럼 오직 실재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상징화 사이의 간극으로서만 주어집니다. 맑스적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사회경제적)하부구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상부구조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지요. 따라서 이러한 이중적 구조사이의 간극을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로하여금 사회적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헤겔이 이야기한 ‘이성과 존재의 통일’도 결국은 이러한 부정적 이중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코엔형제의 이번 영화 <번 애프터 리딩>도 결국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오인의 구조의 불가피성을 드러내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전직 CIA요원이었던 오스본이 어느날 갑자기 CIA로부터 알콜중독 문제 때문이라는 이유로 한직으로 좌천된다는 통보를 받고 퇴직을 결심합니다.그러나 오스본은 이것을 조직의 음모라고 생각하지요(최초의 오인). 한편 그의 부인 케이티는 그의 갑작스런 사직이유에 의심을 품고 이혼 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그의 컴퓨터에서 은밀히 데이터를 복사해 냅니다(두번째 오인). 케이티에 의해 복사된 CD는 우연치 않게 한 헬스클럽으로 흘러 듭니다. 그 CD를 발견한 핼스클럽직원인 채드와 린다는 이 CD가 중요한 국가기밀을 가진 데이터라고 믿고 오스본에게 CD를 건네주는 댓가로 돈을 요구합니다(세번째 오인). 오스본에게 돈을 받기로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린다는 중요한 국가기밀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CD를 러시아대사관에 팔아 보려고 시도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이 CD의 가치를 인정하고 돈을 지급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지요(네번째 오인). 한편 케이티의 정부인 해리는 자신이 누군가(일종의 비밀요원)에게 쫓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다섯번째 오인) 그리고 케이티는 해리와 결혼하려하지만 해리는 다시 부인에게 돌아가려고 하고 해리의 부인은 그와의 이혼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미행을 붙이며 린다는 온라인만남을 통해 해리를 자신의 진실된 남자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일곱번째 오인). 그리고 린다는 성형수술을 통해 자신이 이상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지요(여덟번째 오인). 기타등등. 마지막으로 CIA는 이 모든 사건들의 연쇄를 외부에서 관찰만 하려고 하지만 결국 오스본에게 총을 쏘면서 그리고 린다에게 성형수술비를 지급하면서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그들에게도 이 일련의 사건들은 논리적으로 이해불가능한 무엇이 됩니다.(마지막 오인)

이처럼 이 영화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오인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가 결국 이러한 이중 삼중의 오인들 속에서만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오인의 구조에서 벋어날 방법은 지구 안에서는 없습니다. 오인의 극단에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지요. 이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의 카메라의 시선은 시작할 때 지구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끝날 때 지구 안에서 지구 밖으로 향합니다. 오인에서 벋어나는 길은 지구의 바깥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바탕의 소란스러운 헛소동을 보여주는 이 자칫 이해하기 힘든 블랙코메디를 통해서 코엔형제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실이란 것이 결국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인의 구조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면 실재와 가상 혹은 환상 간의 간극을 드러내는 것은 그것의 순수한 부정성을 적극적으로 승인 혹은 노출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닐까요? ‘무의식’ 혹은 ‘증상’이라는 것은 프로이트가 그의 정신분석작업을 통해서 보여준 것처럼 증상이 증상이라는 것을 모를 때에만 증상일 수 있으니 말이지요. 다시말해서 증상이 증상임을 인식하는 것,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으며 이데올로기적 가상으로 현상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이처럼 실재와 가상간의 간극 혹은 시차視差를 드러내는 <번 애프터 리딩>은 매우 현실적이면서 탁월한 영화입니다. 영화같은 현실 혹은 현실 같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오인의 이중적 구조를 뛰어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