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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이것은 지독한 멜로일까. 아니면 장르의 묵은 피를 갈아치우는 새로운 뱀파이어 영화일까. 악마적인 매력의 팜므 파탈이 등장하는 고전적 범죄극으로 보면 어떨까. 대속(代贖)과 부활과 영생의 테마를 역설적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종교 영화인 것은 아닐까. 유혈이 낭자한 파국 속에서도 수시로 킥킥 웃음이 나오게 하는 블랙 코미디로는 또 어떻고.

4월24일 마침내 기자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4월30일 개봉)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취향이나 시각에 따라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방향에 먼저 집중해도 좋다. 이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니까. (뒤집어서 말하면, ‘박쥐’는 어떤 방향에서 읽어도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잡히는 영화가 아니기도 하다. 한 번 더 본다면 아마도 이 작품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당신은 결국 독창적이고 입체적이며 복합적인 이 작품을 통해 영화적 체험의 강렬한 극단에 도달할 것이다. 이야기든 스타일이든 연기든, ‘박쥐’는 끝까지 간다. 게다가 스토리와 캐릭터에서 에피소드와 디테일까지, 이 영화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오래 전부터 기대하며 기다려온 작품에서 신천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관객으로서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신부(神父)인 상현(송강호)은 백신 개발 실험에 자원해서 아프리카로 갔다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지만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받아 기적적으로 소생한다. 라여사(김해숙)는 그가 치유력을 지니게 됐다는 소문을 믿고 찾아와서 아들 강우(신하균)의 병을 고쳐달라고 애걸한다. 강우는 집에 찾아온 상현이 어린 시절 친구임을 알아 보고 반긴다. 강우의 집을 드나들던 상현은 곧 그의 아내인 태주(김옥빈)에게 격정적으로 끌리기 시작한다.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같은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박쥐’는 건조하고 소박하게 시작한다. (심지어 이 영화의 첫 쇼트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극 초반은 다소 불친절하거나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 상현이 아프리카에서 신비한 일을 겪고 태주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코스들을 질주한 끝에 장대한 핏빛으로 끓어 넘친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서로 다른 질감의 탁월한 신(scene)들이 적어도 세 개 존재한다.)

그 사이 무력감에서 시작한 한 사내의 숭고한 희생 정신은 타오르는 욕망과 폭발하는 분노와 솟아나는 회의와 짓누르는 가책의 어둡고 긴 터널들을 차례로 거친 후, 마침내 대지의 끝에서 바다를 만난다. 말하자면 이것은 괴물이 된 성자의 레퀴엠이고, 끝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파우스트의 지옥도이며, 쥐의 몸과 새의 날개를 지닌 채 경계의 칼날 위에 필사적으로 재겨디디려 했던 박쥐의 화석이다.

‘박쥐’의 스토리는 140여 년 전의 프랑스 소설(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뒤 뱀파이어 장르의 틀 속에서 신부를 주인공으로 삼아 비틀어 착종한 결과물이다. 다분히 이물감이 느껴질 만도 한 결합이지만,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난폭할지언정 거칠지 않은 동시에 강력한 흡인력을 지녔다. 아울러 이토록 처절한 이야기 곳곳에서 관능과 유머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박찬욱 감독은 흡혈귀를 주인공으로 삼고도 편하게 장르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햇빛을 쬐면 안 되기에 밤에만 활동해야 한다는 점 정도만이 차용되었을 뿐, 이 영화의 뱀파이어는 심지어 송곳니조차 없다. 흡혈 장면도 많은 경우 병에 담아 주스처럼 마시거나 링거액 튜브를 젖병처럼 입에 물고 빠는 식으로 표현된다. (심지어 냉장고에 보관하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워 마시기도 한다.) 여기서 피는 종종 공포를 빚는 가장 효과적인 재료이자 종교적 상징을 함유한 가장 선명한 원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매일매일 섭취해야 할 일용할 양식이다. 그렇게 삶의 근본적인 딜레마는 일용할 양식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고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서 시작해서 이글거리는 햇발 그 자체로 끝나는 ‘박쥐’에서 물은 종종 피보다 진하다. 피의 에로스와 물의 타나토스가 끌고 가는 불마차 같은 이 영화는 결국 빛 속에서 그 둘이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종종 소멸과 죽음의 어두운 메타포를 가진다.)

연기의 측면에서 보면 ‘박쥐’는 송강호가 덜어낸 것과 김옥빈이 더해낸 것이 최상의 조합을 이뤄낸 작품이다. 미답지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한 배우 송강호는 여기서 다시금 우리를 또 다른 방식으로 감탄케 한다. 안으로 함몰되고 또 함몰되어 마침내 자신의 가슴 속에 블랙홀을 가지게 된 자의 텅 빈 표정은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김옥빈은 자신의 직업이 배우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작품 하나를 갖게 되었다. 다가올 쾌락을 떠올리는 요부의 조바심, 욕망의 관성을 억제하지 못하는 육식동물의 본성이 작은 얼굴 위에서 기적처럼 빛을 내는 순간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강력한 스펙터클이다. 김해숙 신하균 박인환 송영창 오달수의 좋은 연기도 충분히 박수받을 만 하다.

박찬욱 감독은 3주 전에 열린 이 영화의 제작발표회에서 “걸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든 영화 중에서 제일 나은 작품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작품이 그의 최고작이라고 단번에 확언할 순 없다. (나는 지금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리며 두 작품을 저울질하느라 고민에 빠져 있다.) 하지만 ‘박쥐’는 명백히 걸작이다.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