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 180] 강릉 선교장의 아름다운 정자 활래정
- 작성일
- 11-08-22 23:28
가족과 함께 보내는 여름 휴가, 만약 행선지를 강릉으로 정했다면 선교장처럼 매력적인 집도 없을 듯하다. 어스름하고 고즈넉한 새벽녘, 뒷동산의 솔숲을 가만가만 걸으며 태고적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작은도서관으로 개조된 열화당(悅話堂)에 들어가 물끄러미 서가를 보다가 책 한 권 툭 꺼내 정말 오랜만에 달콤한 독서를 할 수 있다. 중간에 바람 쐬러 잠시 고택을 거닐면 아름다운 정자 활래정(活來亭)과 만나게 된다. 활래정에 올라 송화밀수를 마시며 연못 가득 채운 홍련을 보노라면 세상에 이보다 호사스런 일도 없겠지 싶다.
선교장은 열린 집이다. 영조 때 집주인 이내번(李乃蕃)이 처음 염전을 경영해 가업을 일으킨 뒤 순조 때 집주인 이후(李垕)는 열화당(1815년)과 활래정(1816년)을 건립해서 저택을 일신하였다. 선교장은 관동팔경을 탐승하러 온 많은 시인묵객이 드나들며 교류하던 살롱 같은 곳이 되었고, 외국인들의 발걸음도 이어져 한말에는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차양 시설을 선물 받아 열화당에 입혀졌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IOC 위원들을 위해 활래정에서 다회가 열렸다.
선교장의 아름다운 정자 활래정, 문득 이 정자의 이름 ‘활래’의 뜻이 궁금해진다. 다행히 정자에는 활래정의 초건 기문과 중건 기문이 모두 걸려 있다. 아래에서는 조인영(趙寅永)이 집주인 이후를 위해 지은 초건 기문을 보기로 하자.
영동(嶺東)은 물이 많다. 바닷가에 있는 호수가 열 몇 군데 되는데 경호(鏡湖)가 최고이다. 경호를 둘러싼 삼십 리는 마디마디 난간과 층층이 정자가 우뚝 서서 즐비하다. 그런데, 임천(林泉)이 족히 성품에 맞고 전원(田園)에서 족히 삶을 즐길 수 있어 물을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하나의 구역을 이룬 것으로 말하자면 다시 오죽헌(烏竹軒)과 해운루(海雲樓)를 꼽는다. 이것들은 경호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오죽헌과 해운루 사이에 사문(斯文) 이백겸(李伯兼)1)의 선교장(仙橋庄)이 있다. 묏부리와 시냇물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토양이 비옥해 곡식에 적당하며 과일이 썩고 물고기가 거칠면 보내고 값을 받지 않는다.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있다. 옛날 내가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호수를 지나는데 백겸과 만나 술병을 쥐고 달밤에 배를 띄웠다. 이어서 선교장을 방문하고 즐겁게 놀았다. 매번 여기에 집터를 정하고 동도주인(東道主人)이 될 것을 기약하였다. 비록 세상의 흙먼지 속에 출몰하느라 능히 스스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미상불 호수와 바다 사이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금년 가을 백겸이 와서 말했다. “선교장 옆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전당연(錢塘蓮)2)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두어 주자(朱子)의 시구 활수래(活水來)3)의 뜻을 취해 ‘활래(活來)’라고 편액을 걸었네.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며 스스로 즐거워하는데 내가 사는 곳은 그대도 감상한 적이 있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짓지 않겠는가?”
내가 말했다. “주자는 마음을 물에 비유하였는데 물은 본디 허경(虛境)일세. 지금 그대는 참으로 이렇게 맑고 잔잔한 물을 활력 있는 물이라고 하는가? 더구나 물이라 이름붙인 것은 모두 활력 있는 것일세. 샘물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우물물은 길어도 마르지 않네. 강과 바다처럼 큰 것도 물결치는 온갖 모양이 활력이 없으면 물이라 하기 어렵네. 하물며 경호와 동명(東溟: 동해)은 그대의 집 정원에 있는 것일세. 천만 골짜기의 시냇물이 함께 흘러가 호호(浩浩)하고 왕왕(汪汪)하여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어 그 끝을 알지 못하네. 곧 천하에 빼어난 특이한 볼거리이며 물의 활력도 이보다 더하지 않거늘 하필 집 아래 우묵한 동이 같은 데서 떨어지는 물에 구구하게 마음 쓰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본디 활력이 없지 않으나 활력이 없음을 근심하는 것은 외물이 누를 끼치기 때문이네. 벼슬하는 사람은 총애를 잃을까 근심하고 서민은 이문을 쫓아다니고 선비는 옷과 음식을 마련하고 배와 수레를 탈 만한 돈이 없지. 백겸은 그렇지 않네. 거듭 춘관(春官)에 올라 비록 합격하지 못해도 태평하게 마음에 두지 않았네. 낙토에서 살고 명소에 자리 잡아 이미 스스로 쇄락(灑樂)하여 구애받을 것이 없네. 그래서 영동의 여러 명승을 능히 마음껏 유람하고는 높은 산과 큰 바다도 도리어 싫증이 나자 여기 이 정자에 자취를 거두고 기심(機心)을 없애4) 자기 마음에 활력을 부치기를 원한 것이라네. 그러니 마음에 맞는 곳이 정히 멀리 있지 않으며 작은 연못의 조그만 물도 호수와 바다가 될 수 있다네. 꽃나무가 햇빛을 가리고 삼단이 어지럽게 늘어서고 우거진 갈대에 맑은 이슬이 내리고 물고기와 새가 사람을 가까이 하는 풍경이 곧 대강의 구경거리가 되겠지만 아직은 글로 적지 않으니 잠시 내가 다시 동해 바닷가에 놀러 올 날을 기다리게.”
1)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垕)이다. 그는 1815년 선교장에 열화당(悅話堂)을 짓고 이듬해 활래정(活來亭)을 지어 현존하는 선교장의 규격을 갖추었다.
2) 중국 명나라 남경 전당지(錢塘池)에 있는 수련. 강희맹(姜希孟)이 전당연을 조선에 들여와 재배에 성공한 후 점차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3) 『주자대전(朱子大全)』권2「관서유감(觀書有感)」제1수에 “반 이랑 네모난 못 거울처럼 열리니 /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 묻노니 어이하여 이다지도 해맑은가 / 근원에서 활수(活水)가 솟아나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는 시구가 있다.
4) 機心은 ‘꾀를 부리는 마음’이다. 『장자(莊子)』에 “내가 우리 스승에게서 들으니,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꾀를 부리는 일이 있게 되고, 꾀를 부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꾀를 부리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다.[吾聞之吾師 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라는 말이 있다.
- 조인영(趙寅永), 「활래정기(活來亭記)」, 『운석유고(雲石遺稿)』
강릉은 아름답다. 비갠 이른 아침 대관령 바우길, 그 감미로운 공기와 우렁찬 냇물 소리가 어우러진 수풀의 총체성이 아름답다. 비바람이 부는 동해의 바닷가, 그 기기괴괴한 암석과 형형색색의 파도가 어우러진 바다의 총체성이 아름답다. 수풀의 총체성과 바다의 총체성을 온전히 표현하기엔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유한한가. 자연의 총체성이 드러내는 무한의 세계는 차라리 심미적인 깨달음의 대상이 아닐까.
구극(究極)의 경지는 같다. 심미적인 깨달음은 꼭 자연을 보아야만 얻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어서도 만날 수 있다.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일찍이 책을 읽고 환히 깨달은 바가 있어 시를 지었다. 첫 수를 소개하면 이렇다.
<반 이랑 네모난 못 거울처럼 열리니 /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
묻노니 어이하여 이다지도 해맑은가 /
근원에서 활수(活水)가 솟아나기 때문이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는 맑은 연못, 그것은 마음의 본래적인 모습을 형용하는 비유적인 실체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황은 이 시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반 이랑 네모난 못 거울처럼 열리니’는 마음 전체의 맑고 밝은 기상을 말한 것이고,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는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남김없이 비춘다는 뜻이고, ‘묻노니 어이하여 이다지도 해맑은가’는 마음이 어떻게 맑은 본체를 갖게 되었는가를 물은 것이고, ‘근원에서 활수가 솟아나기 때문이지’는 천명의 본연을 밝힌 것이라고.
그렇지만, 이황은 주희가 노래한 마음의 본체를 실제 연못을 보고 구하고자 하였다. 도산서당에서 가까운 천운대(天雲臺)에 올라 이황은 이런 시를 지었다. <솟아나는 활수는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의 거울이라 / 주자는 독서하며 작은 못에 깊은 비유 / 내가 지금에 맑은 못 위에 서 보니 / 주자의 그때와 비슷하여 길이 감탄하네> 주희가 책을 읽고 마음의 본체를 발견하였다면 이황은 연못을 보고 마음의 본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후(李垕)가 선교장 앞마당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워서 ‘활래’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그는 주희의 시구를 알고 있었고 아마 이황의 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굳이 정자 이름으로 활래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방당(方塘)을 연상시키는 시어였을 뿐 아니라 선교장 옆에 있는 경호(鏡湖)의 이름 ‘거울[鏡]’과도 호응하는 시어였기 때문이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본체는 천지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던가. 경호(鏡湖)는 둘레가 30리인데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 참으로 거울 같다는 명성이 있었고 아무도 익사한 사람이 없어 군자호(君子湖)라는 별칭이 있었다.
활래정의 진정한 뜻은 열화당과 비교해야 드러날 것이다. 열화라는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친척과 정담을 나눔을 기뻐하며(悅親戚之情話)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근심을 없앰을 즐거워한다(樂琴書以消憂)’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속세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전원에서 유유자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힌다. 그렇게 보면 활래 역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심성을 수양하며 살겠다는 뜻이나 진배없다.
그렇지만 선교장 집주인이 고향에서 유유자적하기에는 조선의 정치가 평온하지 않았다. 사실 활래정 기문을 지어 준 조인영은 혜경궁 홍씨의 오촌 친척으로 정조가 1795년 화성에 행차하여 회갑 잔치를 벌였을 때 외빈으로 참석했던 인물이고, 후일 그의 질녀가 정조의 손자와 혼인하여 헌종을 낳자 헌종에 대한 보도(輔導)를 자임하며 조선의 세도를 놓고 안동 김문과 격돌한 풍양 조문의 지도자였다. 선교장은 이와 같은 중앙 정국의 동향에 상당히 예민한 관심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아들과 손자 모두 오랫동안 서울에 체류하느라 활래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그 결과 이후의 증손 이근우(李根宇: 호는 경농(鏡農))가 1906년 활래정을 중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연이 활래정 앞 연못에 가득한 홍련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안개처럼 사라진 전설일 뿐이다.
글쓴이 : 노관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