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브랜드로 점령당한 도시경관
- 작성일
- 10-07-21 13:21
제가 한 때 아파트를 지어대는 건설회사에 몸담아서가 아니라
아래 아파트 관련 글에 댓글을 달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한 번 썰 풀어볼까 합니다.
예전에 제 지도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아파트 외벽에 있는 건설사 로고랑 브랜드... 그런거 다 못하게 해야돼"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교수님의 논거는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아파트의 주인은 건설회사가 아니라 엄연히 주민이다.
2.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설계하는 것도 아니고 집주인도 아닌데 왜 남의 재산에 자기네 광고를 하는가.
3. 업무용 건물 등 다른 건축물이나 토목구조물을 보면 저렇게 건설사 이름 새겨넣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4. 외국에서도 저렇게 크게 건설회사 광고해주는 건물, 특히 주택은 찾아볼 수 없다.
5. 결정적으로 저런 브랜드와 로고가 도시경관을 지배한다.
아파트에 각종 문구가 판을 치는 우리 현실에선
어쩌면 정말 들어맞지 않는 말인 것은 부분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맞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엄연히 놓고 보면 건설회사는 집만 지어줄 뿐입니다.
개발은 개발업자나 땅주인이 하고 (재개발, 재건축의 경우 재개발조합, 신규 택지개발의 경우 지자체나 공사)
설계는 설계사무소가 하고 (건설회사는 현행법상 설계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완성물인 아파트 각 세대 및 공용공간은 결국 집주인들의 소유물인데
왜 거기다가 수많은 참여자 중 하나일 뿐인 건설사의 광고를
대대적으로 해주어야 하는지는 좀 생각해볼 일인 듯 싶습니다.
또 그러한 일종의 광고판들이
우리네 도시 여기저기의 경관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웃기고요.
버스를 타고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보거나
당장 올림픽대로를 따라 달려보기만 해도
여긴 래미안, 저긴 자이, 저어기는 힐스테이트, 길건너는 e편한세상 입니다.
전 많은 나라를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조금 경험해보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렇게 외벽을 각종 기업 로고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례를
기업 헤드쿼터를 제외하곤 본 적이 없네요.
아파트와 같은 주택은 말할 것도 없구요.
아파트와 같은 주택은 말할 것도 없구요.
우리와 여건이 여러모로 비슷하여
아파트가 많기로 유명한 일본과 홍콩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아파트의 외벽에 브랜드 이미지와
건설사 로고를 큼지막하게 때려박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국내 다른 건축물이나 토목구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종로, 테헤란로 등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한 상업용/업무용 건물들에는
건설회사의 로고는 커녕 누가 설계했는지, 누가 시공햇는지 잘 표시조차 안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건물 주인이 누구이냐가 관심있을 뿐
건물이 지어지기까지 관여한 사람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건물 한켠에 보면 설계자가 누구고 시공, 감리는 누가 했는지를
작은 표석 같은것에 표시해두긴 합니다.
하지만 아파트처럼 브랜드를 막 티나게 써붙이진 않죠.
오히려 뽀대나는 커튼월 유리 입면과 첨단스러워 보이는 재질감만 강조할 뿐입니다.
암튼 현실은 좀 웃깁니다.
오히려 아파트 주민들이 브랜드 가치가 높은 브랜드를 달아주기를 원합니다.
일례로 래미안이라는 브랜드가 뜨기 이전에 지었던 '삼성아파트' 주민들이
나중에 래미안이 뜨고 나니 자기네 아파트에도 래미안을 달아달라고 할 정도니.....
그리고 강남을 중심으로한 더욱 눈 높으신 아파트 소비자들께선
국내 메이저 건설사의 주택브랜드도 별로 성에 안 차신다 하여
도곡렉슬, 레이크팰리스, 분당파크뷰 등과 같이
아에 자기네들만의 브랜드를 따로 만들어서 더욱 크게 붙이고
건설사 BI는 살짝 티 덜 나게 하는 사례도 보이고 있습니다.
수도권의 대표적 신도시인 분당, 일산 등 2기 신도시에 가면
아파트 외벽에 "XX 마을" 등으로 표시한 아파트들이 꽤 있습니다.
건설회사의 이름도 표기하긴 하지만 마을이름이 우선입니다.
아파트 외벽에 뭔가 글씨를 크게 써대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소박한 공동체 의식을 아파트의 외벽에 표현하는 것이
아파트의 브랜드와 건설회사의 로고만으로 치장한 것보다는
그나마 나아보이는 것이 웬지 씁쓸합니다.
수십년에 이르는 우리나라 아파트 건설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아파트의 형태와 외관에 대한 논의와 사회적 고민은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이 현실인 듯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