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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근대는 다채롭다. 흔히들 한국 근대 하면 ‘국한문 근대’ 혹은 ‘일본어 근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한문 근대’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근대를 살아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하지만 새롭게 인간과 세계를 한문으로 기록하였다. 한문은 전통의 언어인 동시에 근대의 언어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경험한 근대, 우리가 관찰한 근대, 우리가 사유한 근대의 총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시지탄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근대 문집을 필두로 20세기의 한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에 우리가 경험한 ‘한문 근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그것은 개성 상인이 1928년 해외 홍삼 판매 현황을 시찰하러 대만에 출장을 다녀온 이야기이다. 한국-대만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예상되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대만 여행 이야기, 과연 식민지 시기 개성 사람에게 비쳐진 대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5월 5일. 아침에 일어나니 묵은 비가 그치고 상쾌하게 갰다. 향기로운 바람이 사람에게 살랑댄다. 흡사 우리 나라 6월 중순 기후이다. 식당에 들어갔다. 식품의 종류가 대개 윤선(輪船)에서 나왔던 음식과 차이가 없다. 식후에 차를 몰아 대북(臺北) 신사를 참배했다. 신사는 도시 북쪽 검담산(劍潭山) 산기슭에 있는데 북백천궁(北白川宮) 전하를 위해 설립한 것이다. 명치(明治) 29년 대만 정벌의 전역에서 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서거하였다. 그래서, 그 혼령을 위로하는 것이다. 신사의 제도는 숭엄하다. 수풀이 우거지고 석등 수 백 개가 나란히 좌우에 늘어섰는데 모두 대만(臺灣) 관민이 봉헌한 것이다. 담수 한 줄기가 신사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이름이 검담(劍潭)이다. 검담 옆에 절이 있는데 이름이 검담사(劍潭社)이다. 옛날 정성공(鄭成功)이 이 땅을 개척하고 보검을 물 속에 던졌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일행은 신사 앞에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차를 몰아 시가를 한 바퀴 돌고 삼정(三井) 회사 대북 지점에 갔다. 지점장 진구정성일랑(津久井誠一郞) 씨가 흔쾌히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대북시는 대만의 서울로 총독부 및 주청(州廳), 기타 각 관아의 소재지이다. 학교, 병원, 박물관, 도서관, 식물원 등의 문화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이 없다. 도로는 넓고 깨끗하고 건축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쌀과 차를 거래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점포가 번창하고 상업이 융성하다. 담수가 관류하고 풍경이 수려하며 인구는 이십만이라 한다.


   11시 경에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관내에 진열된 것은 곧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에 건너오기 전후 300년 이래의 고적과 보물이다. 번인(蕃人)의 일용 기구, 창ㆍ칼ㆍ활ㆍ화살, 복식과 형구 등의 물건을 두루 구경하였다. 그 고대 풍속을 상상할 수 있다.


   12시에 삼정(三井)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차를 몰아 약 40분이 지나 담수(淡水) 항구에 이르렀다. 항구는 대북 시에서 13리 떨어져 있다. 이 항구는 일찍이 지나(支那)와 무역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수십 년 이래 조수가 점차 줄어들고 모래톱이 고르지 않아 20톤 이상 선박은 출입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역 상황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한다. 대둔산(大屯山)이 그 북쪽에 솟았고 봉래산(蓬萊山)이 그 동쪽을 감돌며 담수가 그 사이를 흐른다. 300년 전 화란(和蘭) 사람이 세운 양관(洋館)과 지나(支那) 시대에 쌓은 포대가 있어 옛날의 번영을 보는 것만 같다. 근래 대북에는 유력한 관민이 구락부(俱樂部)를 세우고 겸하여 운동장을 설치해 일요일에 산책하고 휴양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오후 3시에 차를 몰아 초산(草山) 온천을 지나 북투(北投) 온천인 팔승원(八勝園)에 도착하고 나서 숙박하였다. 이에 앞서 삼정 회사에서 우리 일행을 초산 온천에 초대하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 황제(皇弟) 고송궁(高松宮) 전하가 초산에 왕림하여 일박한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에 북투 온천으로 변경된 것이다. 그런데, 담수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선 잠시 초산 풍경을 탐승하고 나서 북투에 가려는 계획으로 차를 몰아 초산에 올랐는데 순경이 앞으로 가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아직 30분 여유가 있으니 마땅히 먼저 가서 북투에서 어가를 지영(祗迎)하겠다고 답하자, 순경이 마침내 통행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질풍처럼 고개를 내려가 산모퉁이의 돌아가는 곳에 당도했는데 뜻하지 않게 차 하나가 갑자기 올라와 형세가 장차 서로 닿으려 하였다. 내가 탄 차의 운전수가 급히 차의 왼쪽 바퀴를 잠깐 피하려 하다가 백 길 낭떠러지에 절반이 기울어졌다. 다행히도 덤불이 감싸서 추락할 뻔 하였지만 추락하지는 않았다. 일행은 놀라 차에서 내려 낭떠러지에 매달린 모습을 보니 위기일발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간담이 서늘하여 마음을 스스로 진정할 수 없었다. 급히 인부를 불러 가까스로 차를 위험에서 구하고 다시 탑승하여 북투에 당도해서 어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마침내 북투 온천에 도착하였다. 여기를 팔승원이라 한다. 진구정(津久井) 지점장 이하 너덧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렸는데 차가 위험했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사진을 찍고 기생과 마주 보며 술잔을 잡으니 가히 ‘회도작소(回桃作笑), 선우후락(先憂後樂)’이라 이를만하다. 밤이 깊어 대북반점(臺北飯店)으로 돌아가 숙박하였다.


   (중략)


   5월 11일. 아침식사 후 삼정(三井) 회사 출장소를 찾아가 사원 길강(吉岡) 씨의 안내를 얻어 차를 몰아 남산에 올라 시(=高雄市) 전체를 조망하였다. 시의 설치는 만을 끼고 동서로 나뉘는데 동은 기후(旗後)라 하여 본토인의 구시가이고 서는 신가(新街)라 하여 일본인의 신시가이다. 주청(州廳)의 소재지이다. 인구 4만여 명이고 쌀, 사탕, 철제품 등의 무역액이 1억 8천만 원이다. 남방의 유일한 양항(良港)으로 현재 비록 기륭(基隆)에 버금가지만 새롭게 일어나 발전할 희망이 있다. 만(灣)이 깊고 넓고 해안이 튼튼해서 8천 톤 급 거함 10여 척이 능히 정박할 수 있다. 만의 입구가 호리병 같아 불과 60여 척이다. 확장에 착수해서 공사가 완성되면 1만 톤 급 선박도 쉽게 출입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증기선으로 갈아타서 만의 안쪽을 일주하였다. 산수가 굽이굽이한 것이 하늘이 낸 만이다. 맑은 바람이 사람에게 살랑대고 경색이 매우 아름답다. 지금 선편 유람을 어제 승용차 드라이브와 비교하면 염량(炎凉)과 한망(閒忙)이 현격하게 달라 감흥을 일으킨다.


   오후 1시 기차를 타서 2시 반 대남역(臺南驛)에 도착하였다. 역전 삼정물산(三井物産) 회사 지점에 들어가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후에 대만제당(臺灣製糖) 회사를 시찰하고 문묘(文廟)를 참배하였다. 묘제(廟制)가 우리나라 서울 경학원(經學院)과 방불하고 유사한데, 예의문(禮義文)과 도덕문(道德文) 두 문 및 세수지(洗手池)와 문성루(文星樓) 등이 더해졌다. 나가서 개산신사(開山神社)에 이르렀다. 신사(神社)는 정성공(鄭成功)을 위해 설립된 것이다. 정성공은 명말(明末) 때 사람이다. 그 아버지가 무역 때문에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長崎]에 건너가 일본 여자에게 장가 가서 정성공을 낳았다. 그 아버지는 귀국하고 다시 오지 않았고 그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명나라에 와서 거기서 살게 되었다. 명나라가 망할 때가 되어 명조의 자손을 이끌고 난을 피하여 여기에 와서 먼저 살던 화란(和蘭) 사람과 서로 용납하지 못해 서로 싸우다가 비로소 승리를 얻어 통치권을 장악하고 이 땅을 주재하고 동평왕(東平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이것이 약력이다. 신사의 제도가 극히 장엄하다. 다시 나가서 대남신사(臺南神社)를 참배하고 곧 영천루(鶯遷樓)에 갔다. 삼정(三井) 회사가 초대한 연회에서 술잔을 잡고 즐겁게 놀았다. 밤이 되어 역으로 나가 대북(臺北)을 향했다.

 
-공성구(孔聖求) 편(編),「일기(日記)」, 『향대기람(香臺紀覽)』 
 
 
 
 
 

  조선시대에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북벌의 비원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한 임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효종의 재위 기간 중국 대륙에서 실제 북벌이 시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북벌의 주인공은 하문(厦門)의 해상 세력인 정성공(鄭成功). 그는 남명(南明) 영력제(永曆帝)의 신하로서 대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南京)을 공략하였다. 이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그는 1661년 대만으로 건너가 네덜란드 세력을 격파하였고 비록 그는 이듬해 급사했지만 정씨 일가는 23년간 대만을 지배하였다.

   조선 사회가 대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조선의 대만 인식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에 따라 크게 숙종대, 정조대, 고종대, 이렇게 약 백 년 주기로 세 단계의 변화가 있었다. 숙종대에는 정성공의 해상세력에 대한 사회적인 위기의식이 높았다. 정성공이 충청도에서 가까운 해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 정성공이 50척의 배에 병사 수 만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을 공략할 것이라는 소문, 정성공이 한반도에서 새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대책 없이 떠돌았다. 정조대에는 청조 건륭제 치하의 대만에 대한 호기심이 높았다. 당시 조선 사절단은 중국의 궁궐에서 몽골, 회회, 베트남, 미얀마 등 중국 주변 각국 사절단을 볼 수 있었고 그 중에는 대만의 생번(生蕃)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제주도 도민 이방익(李邦翼)이 해상에서 표류하다 대만에서 구호를 받고 중국을 거쳐 조선에 송환된 일이 있었는데, 어명을 받은 박지원(朴趾源)이 청인 임겸광(林謙光)의 『대만기략(臺灣紀略)』 등을 참조하면서 이방익 사건을 기록하여 정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고종대에는 대만으로 뻗어 가는 일본 세력의 확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았다. 세칭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에 개항한 조선 정부는 일본이 유구(琉球) 왕국을 병합하고 이어서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아 대만에 총독부를 세운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구와 대만은 조선의 역사적 비극의 전조(前兆)가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만에 대한 소문을 듣기도 하고, 중국에서 대만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이따금 대만에 표류하기도 하였지만, 대만에 가야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안고 직접 대만을 방문하여 현지에서 대만의 전통과 현대를 체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 식민지 조선에서 『향대기람(香臺紀覽)』이 출간된 것은 한국-대만 교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개성 상인 손봉상(孫鳳祥, 1861~1936)과 공성학(孔聖學, 1879~1957)이 삼업조합(蔘業組合)의 조합장과 부조합장의 신분으로 중국에서의 홍삼 판매 현황을 시찰하러 1928년 사업차 대만과 홍콩에 다녀온 여행을 기록한 것이다. 표류기가 아닌 여행기라는 점에서, 전통 대만이 아닌 근대 대만을 보았다는 점에서, 일반 관광이 아닌 사업 출장이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흥미로운 책이다.

   이들 개성 상인의 전체 여행 기간은 4월 30일부터 6월 11일까지 43일간이었고, 여행 코스는 ‘개성 - 부산 - 나가사키 - 대만 - 홍콩 - 상해 -나가사키 - 부산 - 개성’이었다. 기본적으로 선편 여행이었는데, 특히 일본 나가사키에서 대만 기륭으로 가는 바닷길에서는 독일에서 제작된 고급 여객선 요시노마루(吉野丸)를 타고 호화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대만에서의 일정은 5월 4일부터 13일까지의 열흘 간이었고, 여행 코스는 ‘기륭(基隆) - 대북(臺北) - 담수(淡水) - 각판산(角板山) - 삼협(三峽) - 아리산(阿里山) - 항춘(恒春) - 고웅(高雄) - 대남(臺南) - 대북(臺北) - 기륭(基隆)’으로 전체적으로 ‘대북(臺北)→대중(臺中)→대남(臺南)→대북(臺北)’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열차, 자동차, 증기선이 모두 동원된 첨단 여행이었다. 당시 일본의 미쯔이(三井) 회사가 해외에서 홍삼 판매를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만 각지의 미쯔이 지점을 순회하면서 한편으로 홍삼 판매를 시찰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 보았다.

   대만에는 전통과 현대가 있었지만 개성 상인들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현대에 있었다. 이들은 대중(臺中)에서 대만 원주민의 전통적인 생활을 둘러 보았지만 그들이 현대문명에 점차 적응하고 생활이 개선되어 납세자도 나오고 개업의(開業醫)도 배출되는 현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중(臺中)의 원시림에서 수령 3천년 된 신목(神木)인 홍회목(紅會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였지만 정작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원시림의 목재를 운송하려고 가설된 철도 정류장의 치밀한 설계 구조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상인이었고 그랬기에 여행 일정에 들른 대만 주요 도시의 인구와 주요 산업들을 일일이 체크하며 기록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부산에서 순종 황제의 제사를 지내러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을 보며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꼈고, 홍콩에서 장개석의 북벌 소식을 들으며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들의 관심사는 역시 정치보다는 경제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고 근대전환기 개성 유학의 흐름 위에 있던 유상(儒商)이었다. 동향 선진(先進) 김택영(金澤榮)에 대한 존모심을 갖고 『소호당실기(韶護堂實記)』를 출간하는가 하면 숭양서원(崧陽書院)이나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끝으로 한가지 팁! 이들 개성 상인들이 대만에 체류하던 그 기간에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대만에 왔다. 그의 이름은 신채호(申采浩). 한 달 전 중국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었던 그는 아나키즘 운동의 자금을 확보하러 대만에 왔다가 기륭(基隆)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20세기 대만을 향한 한국인의 발걸음에는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글쓴이 : 노관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