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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말의 정치이다. 그리고 연극적이다. 더 정확히는 연극 콩쿨 같다고 해야 한다. 정치인과 정당은 무대 위의 배우이다. 국민은 객석의 심사위원이다. 무대 위의 정치인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주장이 공화국과 국민을 위한 것이고 규범적으로 정당할 뿐더러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며 열변을 토한다.
상이한 정견이 경합하고 충돌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객석의 심사위원인 국민들은 공화국의 국익과 자기 개인의 사익을 동시에 고려하며 어떤 정치세력을 지지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이 정치적 연극 콩쿨에서 다수결을 차지하는 자들이 승리한다. 그것은 선거일수도 있고, 민주공화국의 공론장에서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정책결정과정일 수도 있다.
 
훌륭한 정치 연극, 영국 의회의 PM Question




영국 의회의 PM Question(내각총리에 대한 질의 시간)은 민주정치의 연극적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 국회의 대정부 질의와 유사한 PM Question은 매주 수요일 12시부터 약 30분 간 영국 총리와 야당 대표 간에 벌어지는 일종의 토론 배틀이다.
30분 동안 영국 총리는 의원들이 던지는 어떤 질문에도 원고없이 답변해야 한다. 사전 질문 통보같은 것은 없다. 한국 국회의 대정부 질의처럼 총리 보좌진이 즉석에서 답변을 대필하는 일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토론 규칙 상으로는 누구나 총리에게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대부분의 질문을 야당 대표가 주도적으로 제기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매주 영국의 공중파 방송에서 생중계된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2012년 12월 10일, 유투브 사이트에 ‘pps 103’이란 네티즌이 바로 이 PM Question의 한 장면을 편집·번역하여 공개했다. 네티즌 사이에서 신선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가운데, 이 동영상은 현재도 간간이 SNS 상에서 공유되고 있다.

출처: pps103의 유투브 채널 - 노동당 당수 밀리반드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발언석상으로 나오는 총리 겸 보수당 당수 카메룬, 의사당 중앙의 큰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보수-노동 양당 지도부가 마주하고 있다. 양당 당수의 좌석 바로 앞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두 당수의 동선이 단순 경쾌하고 토론이 빠르게 이뤄진다. 여야 지도부가 맨 뒷 자리에 앉는데다 발언석이 의원들이 앉아있는 좌석과 너무 멀리 떨어져 토론의 활력이 감소되는 한국의 국회 본회의장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영국에 장기 체류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PM Question 중계방송의 시청률은 예상 외로 높은 편이다. 동영상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재밌기 때문이다. 여야 의원들이 서로를 마주보는 가운데, 좌석 맨 앞자리에 여야 지도부가 앉아 있다. 최전선에 서있는 것이다.
토론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야당 대표가 일어나 질문을 던지자마자 총리가 바로 나와 답변하는 가운데 이를 바라보는 여야 의원들은 환호와 야유를 주고 받는다. 간간히 일반 의원들이 일어나 의장에게 발언권을 요청하여 총리와 야당 대표를 지원하기도 한다.

출처: pps103의 유투브 채널 - 노동당 당수 밀리반드의 발언 모습, 그의 옆에 앉아있는 의원들은 노동당 지도부로서 그림자 내각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보수당 당수이자 총리인 데이비드 카메룬과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반드는 둘 다 40대의 젊은 정치인들로서 패기 넘치고 활력있는 모습으로 상대방을 공박한다. 이들의 언어는 치열하다. 통계 수치와 권위있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과연 저들의 발언이 즉석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논리적이다.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언어는 상스럽지 않다. 위트있는 언어로, 때론 풍자적인 표현을 거듭하며 상대방을 조롱하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저질스럽게 보이지 않고 도리어 품격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들은 PM Question이란 정치 연극의 주연배우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출처: pps103의 유투브 채널 - 영국 총리 겸 보수당 당수 카메룬, 그의 양 옆에 앉아 있는 의원들은 현 보수당 내각의 각료들이다.

국민 앞에 나서서 직접 말하지 않는 한국의 여야 지도부 및 주요 정치인

PM Question 동영상을 보며 한국 국회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한국의 여야 지도부는 영국의 여야 지도부와 달리, 의석의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 뿐만 아니라 정기회 개회 연설을 제외하면 국회 본회의나 상임위원회에서 여야 지도부들이 직접 나와 발언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국회 회의석상과 달리, 격식에 덜 얽매이는 TV 토론 프로그램에조차 여야 지도부가 얼굴을 비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뭄에 콩이 나올 확률보다 적다. 여기에 출연하는 정치인들은 저격수라 불리우며 저열한 언어로 상대 정당과 정치인들에 대한 인신공격조차 서슴치 않는 사람들, 또는 고참 의원들의 명령을 거역하기 힘든 초·재선 의원들이다. 이런 정치인들에게 치열성과 책임성이 동반된 수준 높은 토론을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우리 국민들은 여야 정당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청취하거나 언론에 의해 편집된 화면과 지면을 통해 접할 뿐이다. 이와 같은 의사소통구조에서는 영국 정치처럼 자신의 정견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정치인과 정당의 견해가 3분 가량의 TV 뉴스, 신문 지면의 짧은 인용문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문장보다는 단어가, 그것도 1~2개의 자극적 단어를 선택하는 일이 더 중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론을 통해 유통되는 한국 정치의 언어는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풍부하기보다는 단순하다. 애써 품격을 가장하기 위해 어렵고 권위적인 단어들이 열거되지만 그런 것은 장식일 뿐, 아무 내용도 없다. 오직 짧은 TV 뉴스 화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1~2개의 자극적 단어가 중요하다. 따라서 한국 정치의 언어는 치열하지 않은 대신 상스럽기 그지 없다.

출처: 팩트TV 유투브 채널- 대정부 질의에 나선 은수미 의원(새정연)과 정홍원 국무총리

한국 민주주의의 제1 과제는 공론장의 활성화!

이런 분위기는 첫째, 언론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TV 뉴스 보도나 신문 지면의 편집권을 장악한 언론사주 및 데스크의 자의에 따라 정치적 메시지를 통제하는 것이 매우 쉬워지기 때문이다. 언론이 공정하다면 그나마 안심할 일이나, 한국의 언론은 그 어떤 정당 또는 시민단체보다도 더 당파적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둘째, 정치에서 정책이 실종되는 결과를 낳는다. 영국처럼 주요 정치인들이 국민 앞에 직접 나서서 자기 정당의 정책적 입장을 논리적으로 해명해야 하는 나라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치인들이 정책 공부에 열과 성을 다할 수밖에 없고, 정치적 담화를 구성함에 있어서도 정책을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공론장은 정책적 쟁점들로 넘쳐나게 되며 그 속에서 국민들은 어떤 정책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를 판단하고 이를 토대로 지지 정당과 정치인을 결정한다. 반면 정치인들이 논리적 문장이 아닌 감성적 단어 1~2개만 말하면 그만인 한국에서는 굳이 정책을 논할 필요가 없다.
특히 기득권 세력의 경우, 정책적 쟁점이 형성되는 것 자체를 회피하는 경향마저 가지고 있다. 20% 대 80%의 사회를 넘어 1% 대 99%의 사회가 운위되는 현실에서 1%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정책적 쟁점들이 정치의제의 중심에 놓일 경우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셋째, 국민이 정치적으로 우민화될 우려가 있다. 민주주의에서 우민이란 것은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정치적 선택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 정치에서 저소득·저학력층이 복지정책에 소극적인 공화당을 지지하는 현상같은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미국의 저소득·저학력층이 정말로 무지해서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상반되는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란 점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이들에게 합리적 판단의 준거가 될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조건에서 이들은 본의 아니게 우민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는 어떠한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유권자 중 일부는 정치를 상이한 정치·경제적 배경에 기반을 둔 정당 간의 정책적 경합장이 아닌,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대결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들에게 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호의 맹주가 되기 위해 무림 고수들 간에 벌어지는 이전투구 같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정치적 판단에서 논리가 아닌 의리를 강조하는 경향을 낳으며 민주적 리더십보다는 보스 기질이라 통칭되는 조폭적 리더십이 더 추앙받는 결과를 낳는다. 더불어 20대의 성인의 나이에 부모를 잃은 부잣집 상속녀가 마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윈 소녀가장인 것처럼 오인되고, 그로부터 획득한 동정표로 정치적 입신양명을 이루는 이해하기 힘든 드라마가 펼쳐질 수도 있다.

출처: 연합뉴스 미디어랩 유투브 채널- 2012년 18대 대선 토론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

넷째, 국민은 주요 정치인들의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적합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 영국처럼 준비된 원고 없이 정책적 주요 쟁점에 대해 즉석에서 논리적으로 답변해야 하는 나라에서는 전술핵과 원자로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지하경제 양성화’를 ‘활성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경향신문 관련기사-네이버 옛날신문/한겨레신문 관련기사).
위와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도 영국처럼 여야 지도부와 주요 정치인들이 국민 앞에 직접 나와 서로의 정치적·정책적 견해를 당당하게 밝히고 경합하는 장이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
우선 TV 토론 프로그램에 저격수나 초·재선 의원이 아닌 여야 지도부가 직접 출연하여 날선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어야 한다. 더불어 국회 의사규칙을 손질하여 지금처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정부·여당과 야당이 정책적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며 역동적으로 토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랬을 때, 정치가 재미있어지며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한국 정치에 미쳐지는 언론의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력도 걷어낼 수 있다. 정책이 정치의 중심에 설 것이며 국민의 정치적 선택도 합리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제1 과제는 공론장의 활성화이며, 이를 위한 제도 정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