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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립'이라는 소설가가 쓴 <광개토대제>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1994년 쯤에 나온 책이었는데요. 그때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우연히 그 책을 발견하고서는 정말 신나게 읽었죠.

그 책 속에서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제, 그러니까 광개토대왕도 아닌 광개토대제의 지휘 아래
중국대륙과 몽고벌판과 중앙아시아, 시베리아까지 정복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었죠.
중국인들이 <후연서>라는 역사책을 여태까지 숨겨놓고 거짓말로 역사를 꾸몄다고도 말했고, 
그리고 책 서문과 에필로그에다가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고
비분강개한 어조로 피를 토하며 외쳐댔죠.
어린 마음에 정말이지 헤어나오지 못할 환상적인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한테도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이런 나라였다고 떠들어대기도 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광개토대제>라는 책이 뭔가 이상한 겁니다.
삼국지 냄새가 많이 나는 구절이나 내용이나 플롯들은 그렇다 쳐도...
그러다 <대망>, 그러니까 요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제 이름을 찾아 출간된 대하소설을 보고서야,
이 책이 무슨 책을 베껴 만든 책이었는지 환히 깨닫게 된 겁니다.
아, 정말 <대망>의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옮겨 놓고서,
등장인물들 이름만 바꿔놨더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 죽는 장면을 '성무제'의 딸이 죽는 장면에 그대로 베껴 쓰고,
세키가하라 전투의 일기토 장면을 후연과 북위의 장수들이 전투하는 장면에 역시 그대로 베껴 쓰고,
적벽대전의 플롯을 '녹강대전'으로 이름만 바꿔치기하고,
여몽이 형주를 공략하는 내용을 적당히 각색해서 이름만 바꿔 쓰고...

이런 책 따위나 쓰는 인간이 잃어버린 역사, 일본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회복하자고 버젓이 글을 쓴 겁니다.
게다가 이런 책이 얼마나 많은 유사역사가들, 얼마나 많은 환빠들을 양성했을까 생각하니...
그 책 팔아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양심과 역사를 팔아 번 돈이 얼마나 오래 남나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