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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15대 총선 : 패배는 승리의 어머니

“김영삼 정권 지지율은 22~23%, 신당 지지율은 31%다. 신당은 6~7%만 높이면 어떤 선거든지 당선권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총선과 대선 승리의 근거로 내세운 논리입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주장한 ‘지역 등권론’과 결합된 형태의 신 4자 필승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김대중은 민심이 여권으로부터 심각하게 이반되는 현상을 보이던 수도권에다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호남을 묶는 것으로 선거승리의 필요충분조건은 갖춰진다고 보았습니다. 김종필의 자민련이 여권에서 충청권과 대구경북의 표심을 빼앗는 효과를 내고 있는 만큼, 1987년과는 달리 앞서의 조건만으로도 승리를 노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지요.

 여기에 김대중은 예전보다 보수의 표심을 향해 가깝게 접근하며 포용력을 가진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려 노력합니다. 김대중은 신당을 창당하면서 민정당 출신의 정희경과 이종찬, 중소기업중앙회장 박상규, 보수적인 정치학자 길승흠, 안기부 출신의 강동연, 민병서 등을 대거 영입하고, 2년 뒤의 대선에서는 엄삼탁, 안무혁 등 5,6공 군 출신 인사들에까지 손을 뻗쳐 자기 대열로 끌어들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대중은 1995년 9월 5일 신당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단숨에 제1야당의 지도자로 돌아옵니다. 국민회의는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 김대중의 ‘20억 원 고해성사’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당 소속의 최락도 의원(전북 김제)과 최선길 노원구청장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구속 등으로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빠른 시일 내로 당의 체제를 정비하고 1996년의 15대 총선을 준비합니다.

 15대 총선의 특징은 각 당이 외부 인사들의 영입에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입니다. 국민회의 또한 예외는 아니었지요. 이때 당에 수혈된 인사들 가운데 훗날 민주당과 정계의 주역으로 성장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됩니다. MBC 앵커 정동영, 미국 MBA에 쌍용그룹 상무 출신의 정세균, 대구 출신에 장애인 변호사 남편을 둔 여성 판사 추미애, TV프로그램에서 활약하던 스타 변호사 신기남, 민변 출신 인권변호사 천정배, 민주화운동가-치과의사-시인의 독특한 이력을 가진 김영환(안산의 그 김영환;;),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떨치던 김한길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인물영입에서 나름 풍성한 성과를 거뒀음에도,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이회창과 박찬종을 한꺼번에 영입해 선대위의장과 수도권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면서 완전히 빛을 잃어 버립니다.

 당시 김영삼은 15대 총선에 정권의 사활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집권 이후 3년 동안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참패, 북한 핵 위기, 연이어 터진 대형 참사, 독단적인 국정운영과 어정쩡한 개혁 등으로 민심이 피로와 이반을 나타내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자민련의 창당과 5.18 특별법의 통과로 충청권과 대구경북까지 여권의 지지기반에서 분리되어 버린 만큼 누가 봐도 김영삼과 신한국당의 총선 참패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은 특유의 돌파력과 근성을 발휘해 정면승부에 나섭니다. 먼저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통해 민자당으로 저지른 3년간의 실책들을 덮어버리고 3당 합당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합니다. 그리고 ‘개혁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김영춘 등 재야와 민주화운동가 출신들을 대대적으로 공천하고, 사회 각계의 전문가들을 영입해 전략공천으로 출전시키면서 참신성과 경쟁력을 갖춘 후보들을 대거 수도권에 포진시킵니다. 여기에 개혁성과 선명성을 상징하는 정치권 안팎의 두 인물 이회창과 박찬종을 전격적으로 영입해 화룡점정을 찍습니다.

 그럼에도 국민회의는 정권심판과 정권교체, 경제제일을 내세우고, 장학로 전 청와대 부속실장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선거 초반 판세를 주도해 나가기도 합니다. 당시의 선거 판세에 대해 김옥두 전 의원은 자신의 책에서 국민회의가 120석 가량을 차지해 원내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국민회의 안팎에서는 개헌저지와 국정조사권 발동이 가능한 국회재적 3분의 1인 100석을 목표로 잡고 있었고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두드러진 민심이반과 1995년 지방선거 결과를 감안하면 수도권에서는 분명히 압승을 거둘 것이고, 호남 지역구와 전국구 의석을 합치면 100석은 쉽게 넘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당시 지역구 253석 중 서울 47석, 경기 38석, 인천 11석으로 수도권에만 96석이 걸려 있었던 만큼, 수도권에서의 압승으로 100석을 넘길 수 있다는 계산은 타당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정적인 약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오판이었습니다. 1995년의 민주당 분당이 남긴 상처가 생각보다 크고 깊었던 것이죠. 특히 수도권에서 분당의 후유증은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분당으로 말미암아 환멸을 느끼고 이탈한 야권 지지층은 3김 청산과 새 정치를 내세운 민주당에 잔류하거나, 혹은 민주화 운동 경력과 개혁성, 전문성을 내세운 신한국당 후보에게로 이동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지지기반이 1988년의 평민당 수준으로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회의는 이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죠. 1995년 지방선거에서의 수도권 압승을 이끌어낸 계기들이 민주당 분당으로 말미암아 그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에 총선을 앞두고 북한군이 DMZ에 병력을 투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미세한 국면에 놓여 있던 표심의 저울추가 여권으로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편파보도와 불공정한 선거사범 수사는 패인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15대 총선의 뚜껑이 열리자 국민회의는 거대한 충격에 직면합니다. 국민회의는 제1야당의 자리는 지켜냈지만, 299석 중 고작 79석(지역구 66석 +전국구 13석)에 그치며 목표였던 국회재적 3분의 1선에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올린 97석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결과를 받아들고 참패합니다. 게다가 정권교체의 동력이 되어야 할 수도권에서 예상을 깬 완패를 당하며 당의 존립기반 자체가 흔들립니다. 득표율에서는 25.3%에 그치며 14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올린 득표율보다 3.9%가 하락했습니다. 수도권에서는 54석의 신한국당에 비해 30석에 그쳤고, 수도권과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의석수와 지지율과 지지기반에서 국민회의는 13대 총선의 평민당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셈입니다. 충청권 28석 중 24석, 대구 13석 중 8석을 휩쓸며 16.2%의 득표율로 50석을 획득한 자민련과 힘을 합쳐도 129석에 불과해 139석의 신한국당에 맞서기란 난망한 일이었죠.

 신한국당은 서울에서 47석 중 27석을 휩쓸며 18석의 국민회의를 여유 있게 앞섰습니다. 선거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서울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이명박이 종로에서 터줏대감 이종찬과 스타 정치인 노무현을 모조리 격침시키며 대승했고, KBS 앵커 박성범은 중구에서 2대 46년에 걸쳐 군림하던 정대철을 7천 표차로 크게 꺾어버립니다. 성동을에서는 최고위원 출신의 3선 중진 조세형이 변호사 출신 신인 김학원에게 2천 표차로 패합니다. 지역구 골목골목까지 알고 밥숟가락 숫자까지 안다고 할 만큼 야권에서 가장 지역구를 잘 관리했다던 중랑을의 김덕규, 구로을의 김병오마저 속절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4선에 도전하던 동작을의 박실, 관악갑의 한광옥 등도 신한국당 후보에게 각각 7천 표, 4천 표차로 패하며 정치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놓입니다. 심지어 당의 2인자인 지도위의장 김상현마저 자기 지역구 서대문갑에서 고작 591표 차의 피 말리는 접전 끝에 가까스로 생환합니다. 상대가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청와대 비서관을 거친 중량급 신인 이성헌이었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1995년 민주당 분당의 후폭풍은 개표결과에서 뚜렷이 나타납니다. 국민회의와 민주당의 전국 득표율을 합치면 36.5%로 신한국당의 34.5%에 2%차로 앞섭니다. 게다가 수도권에서의 양당 득표율의 합을 신한국당의 득표율과 비교해 보면 서울 48.7 > 36.5, 경기 41.3 > 33.2, 인천 40.5 > 38.2로 모두 앞서는 결과가 나옵니다. 지역구별로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양당 후보의 득표율을 합치면 야권의 승리로 뒤집히는 지역구가 서울에서는 무려 23곳이며, 경기에서는 15곳, 인천에서는 5곳이나 됩니다. 15대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올린 79석과 민주당의 15석, 무소속의 홍사덕을 합치면 95석입니다. 여기에 위에서 소개한 야권의 득표율 합계가 여권을 앞서는 지역구 43석이 더해졌다면… 물론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표심의 변동을 잡아낸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당시 민주당이 올린 11.2%의 득표율에는 민주당이 표방했던 3김 청산과 새 정치에 호응했던 반여비야(反與非野)의 표심, 그리고 영남 3석과 두 자리 수 득표율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5대 총선은 야권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국민회의는 평민당 수준으로 쪼그라든 당세와 지지기반을 놓고서 정권교체를 도모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은 훗날 결국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으로 바뀝니다. 선거가 끝난 뒤 언론의 관심은 신한국당 내의 대권주자군인 ‘9룡’으로 쏠렸고, 야권이 정권교체에 성공할 확률은 1%도 없어 보였습니다. 9룡 가운데 승리하는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요. 하지만 김대중은 최악의 위기 앞에서 오히려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김종필과의 연대라는 결단을 내립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결단은 김영삼의 공격적인 정국운영에 기인한 점이 있습니다. 김영삼은 신한국당의 과반수 확보를 위해 50석의 자민련과 15석의 민주당, 16석의 무소속에 집요한 구애와 파상공세를 펼쳐 결국 여대야소로 정국을 재편합니다. 당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김종필은 김대중과 손을 잡고 ‘야당파괴 저지’와 ‘총선민의 수호’를 내걸고 공조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김종필이 저런 구호를 외쳤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김영삼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시작된 야권공조는 정책공조와 선거공조로까지 이어지면서 점차 공고해집니다. 96년 말 노원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공천이 처음으로 단행되고, 여기서 자민련 김용채 후보가 승리한 여세를 몰아 97년 3월 수원 장안과 인천 서구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도 연합공천이 이뤄집니다. 양당은 수원에 자민련의 이태섭, 인천에 국민회의의 조한천을 내세워 신한국당 후보에 압승을 거둡니다. 노동법 날치기 파동과 한보사태와 김현철 비리가 폭발하면서 펄펄 끓던 수도권 민심에 연합공천까지 더해 두 후보는 더블스코어로 승리합니다. 두 후보가 올린 득표율은 총선에서 양당이 기록한 득표율의 합계보다 5%가 더 상승하며 야권공조의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김대중은 이를 대선에까지 연장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게 되고, 마침내 이강래와 황태연 등에 의해 ‘DJP 연합’의 틀이 기획됩니다. 김대중은 승리를 장담했던 15대 총선에서의 패배 이후, 집권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한 끝에 결국 5.16 이래 36년 동안 대척점에 서 있었던 김종필을 비롯해 보수 세력의 일각까지도 자기 품 안에 끌어들이는 대대적인 포용정책을 단행한 것입니다.

 정권교체를 위한 김대중의 포용정책은 지역연합과 보수 흔들기 전략을 축으로 진행됩니다. 4자 필승론 류의 단독집권 전략을 포기한 김대중은 자신이 주장한 바 있던 ‘지역 등권론’을 매개체로 삼아 김종필과의 연합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호남과 충청이 연합하고 수도권이 가세하는 ‘서부벨트’ 전략을 기본 구조로 삼고, 여기에 박태준, 박준규, 박철언 등 문민정부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은 TK 출신 보수 인사들을 끌어들입니다. 97년 7월 포항 북구 보궐선거로 정계에 복귀한 박태준은 DJT 연합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과 대등한 위치로까지 대우받고, 김종필로부터 자민련 총재직도 물려받게 됩니다. 엄삼탁 전 병무청장, 안무혁 전 안기부장 등 과거 정권에서 일했던 군 출신과 경찰 출신 인사들도 대거 김대중 지지선언을 하고 국민회의에 입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김대중은 그때까지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지역과 계층에 자신의 안정성과 보수성을 어필하려 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정리하면 15대 총선에서의 패배는 역설적이게도 DJP 연합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의 모체가 되었고, 총선에서 패하고 1년 8개월 뒤, 김대중은 총선 이후 아무도 꿈꿀 엄두조차 못 냈던 정권교체를 현실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올린 득표율은 14대 대선에 비해 대전에서 28.7% -> 45.0%, 충남에서 28.5 -> 48.3%, 충북에서 26% ->37.4%로 약진하였고, 대구경북에서도 8.7% -> 13.1%, 부산경남에서 10.8% ->13.7%로 상승합니다. 이와 같은 성과들이 모인 결과, 김대중은 1032만 표에 득표율 40.3%를 획득하며 4번째 도전 끝에 정권교체를 이룩합니다. 비록 15대 국회 내내 제1당인 신한국당-한나라당에 끌려 다녀야 했고, 그 때문에 국민의 정부 초기 1년 동안 한나라당 의원들을 대거 빼내와 원내 과반수를 채우는 무리수를 범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15대 총선에서의 패배는 거꾸로 15대 대선의 승리의 모멘텀이 된 DJP 연합을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