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베이스볼파크 전광판 내용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hbo

모바일 URL
http://m.baseballpark.co.kr
대표E-mail
jujak99@hanmail.net

경전선 열차를 아시나요?

작성일
09-11-04 01:19
글쓴이
퍼스나콘 영계소문
글쓴이다른 게시물 보기
조회
12,311
댓글
7단계
시간별 역순 댓글

월요일에 직원 아버님의 문상차 대구에 내려가게 되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린후 빈소에 들러 문상을 끝내고

다시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회사에 들어오니 7시쯤 되었다.

6시간 가량에 대구까지 가서 용무를 본 후 돌아올 수 있는 시절이 된 것이다.



올라오는 기차안에서 밖이야 칼바람이 불겠지만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이 연상작용을 일으킨것인지......꿈속에서 나는 유년시절로 돌아가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우리 엄니는 몸져 누우신 아버지 대신에 생계를 떠맡아 가게를 열고 계셨다.

방학이 되면 학교도 가지 않고 엄마 치맛자락만 붙들고 있는 막내아들이 처치 곤란이었던지

나는 멀리 순천에 계신 이모님댁을 거쳐 외갓댁에 보내지는게 연례 행사였다.


전주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고 순천역에 내리면 이모님이 나를 마중나오셨고, 홀로된 이모님이

계시는 순천의 그 집에서 할일없이 뒹굴며 이모님과 동네 친구분들이 소일하시던 10원짜리 민화투판에 끼어

잔심부름을 하는게 나의 일과였다. 이모가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르는 까만 고양이 나비만이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그 시절엔 다들 그랬는지, 우리집만 유독 무신경했는지 국민학교 2,3학년의 어린것을 혼자 기차에

태워 멀리 시골집에 보내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였다.


이모집에서 며칠을 소일하다 이모가 순천역에서 기차를 태워주면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외갓집에 다시

보내지곤 하였다.


경전선 열차......


삼랑진에서 출발하여 진주-순천을 거쳐 원창, 벌교, 보성, 예당, 득량.......그리고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의
무대가 되었던 남평등의 간이역을 지나 광주근처 송정리까지 갔던 경전선 열차......


몇몇 도시의 큰 역을 제외하면 이제는 대부분 무인역사로 변한 간이역을 거치는 쇠락한 기찻길...


벌교에서 꼬막을.. 예당과 득량만의 어선에서 막잡은 잡어들을 다라이라 부르는 빨간 함지박에 담고서
순천역앞의 새벽시장에 내다파는 남도 아지매들이 주로 이용하던 남도의 느릿한 말투만큼이나
느리게 느리게 철길을 달리던 경전선 열차......


기차안에는 폼새없는 아지매들의 거친 남도사투리와 함께 비릿한 갯비린내가 가득했었다.

반농반어의 치열한 삶이 가득찼던 객차안에 나는 짐짝처럼 구겨져서 행여 내가 내릴 역을 지나칠까

조마조마했었다.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었던 벌교를 지나 조성역...나의 외갓집이 있던 곳.


외할아버지는 일찌기 병고로 돌아가시고 팔순의 외할머니가 소박맞고 쫒겨온 약간 지능이 모자랐던
세째이모와 함께 늙은 대추나무처럼 등이 굽어 세월을 견디시던 곳......


작년에 가보니 순천에서 차를 몰고 30분도 안되던 그 길이 그 어린시절 갯비린내와 함께 실려가던

그 시절에는 왜 그리도 멀고 지리하기만 하던지......


염천의 한여름이던지, 칼바람 불던 겨울날이던지.....어느때에 가더라도 양지녘엔 따뜻한 햇살이

비치던 남도의 황톳길...


기차역에서 내려서 가도가도 끝이 없고 지루하던 외갓집 가는길...


인간은 몸이 커지는 만큼 세상이 좁아지나보다. 어릴적 그리도 멀던 그 길이 작년에 가보니 10분거리도 안되던 그 황당함.


어린시절엔 그리도 넓고 광활하던 외갓집의 열걸음도 안될만한 뒷뜰이 내겐 밀림과 같았다.


늙은 외할머니와 이모에겐 일손에 도움도 안되던 어린것이 무엇 대수였으랴?


밥을 주면 밥을 먹고 할 일없이 졸다가 동네의 먼 친척뻘의 형들의 손에 끌려 썰매도 타러 가고,

벼베기가 끝난 논에 제초제를 묻힌 콩알을 뿌려 꿩도 잡으러 갔었다.



근 30여년만에 다시 가게됐던 이 곳. 세월은 이곳만 비껴갔던지......그 시절의 황토벽과 무너진 기와담장 사이로
해당화만 고개를 내밀었다.


왠지 쓸쓸하고 눈물이 배게하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추억이 어리던 경전선 열차......



그 시절의 아지매들은 지금도 함지박에 꼬막을 싣고서 떠들썩한 남도사투리로 서로 안부를 물을까?





세상은 이렇게 점점 빨라져만 가는데......그곳에 가면 아직도 세월을 비껴간 남녘의 풍광이 남아있을까?









[이 게시물은 Lezzt님에 의해 2009-11-04 11:20:19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
Twitter Facebook Me2day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62 말, 당나귀 봄날의 춘의(春意) [29] 퍼스나콘 [탱&서]Xenophon 04-27 25569
61 어도비와 애플간의 싸움을 보면서 [17] 퍼스나콘 서초롱 04-12 15678
60 '게이 남자친구'에 대한 짧은 생각 [13] 퍼스나콘 Pitcher 27 04-12 21047
59 [수취인불매] 봄 나리는 밤. [14] 퍼스나콘 울므 04-12 19478
58 [수취인불매]연말 보고서/한숨 고백. [8] 퍼스나콘 울므 01-02 19804
57 은자가 남겨 놓은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5] 퍼스나콘 울므 01-31 19838
56 이런. 저런. 횡설. 수설. [20] 퍼스나콘 울므 02-05 19022
55 [수취인불매]과거의 설렘과 현재의 그리움이 닿을 때. [6] 퍼스나콘 울므 02-08 18920
54 [구겨진 습작.] 손님. [3] 퍼스나콘 울므 02-10 19532
53 [주정] 때로는. 진실보다 중요한 것. [2] 퍼스나콘 울므 03-05 21982
52 [뻘]美 토크쇼 전쟁 [32] 퍼스나콘 chirp 01-27 35664
51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의 도입부 기억나십니까? [12] 퍼스나콘 알투디투 12-13 23857
50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6] 퍼스나콘 허영이스머프 12-01 11854
49 [수취인불매] 문학 소년이여. 가볍게 혹은 무겁게. [2] 퍼스나콘 울므 11-29 14046
48 루저녀의 사례로 본 자유와 민주주의의 관계 [13] 퍼스나콘 punkrocker 11-17 16319
47 루저녀의 난을 보면서 느낀 개인적인 단상 [28] 퍼스나콘 (Z)얼레한디려 11-12 14694
46 경전선 열차를 아시나요? [5] 퍼스나콘 영계소문 11-04 12312
45 현직 용접공이 본 현대자동차의 미래 [9] 퍼스나콘 ☞菊雙羅經原☜ 10-27 13417
44 캠리의 변천사 [31] 퍼스나콘 Pitcher 27 10-28 20727
43 [S  K] 잔인한 확률의 게임 [9] 퍼스나콘 {DNA}1대당수 10-25 12366
<<  1  2  3  4  5  6  >>
copyright